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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풍경 - 박형준 본문

문학의 즐거움/시사랑

천변 풍경 - 박형준

초록느낌 2010. 9. 28. 15:46

 

 

 

 

  강물 속에 무지게가 떠 있습니다 내장을 꺼내놓은 산이 빨래를 하는 누나의 손끝에서 잘게 부서지고, 단풍잎 하나가 원을 그리며 누나의 치마폭까지 밀려왔다간 강모래 속으로 사라집니다 누나의 뒤로는 고목이 하늘로 날아가려고 하는 커다란 까마귀 같은 모습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습니다

  줄에 널린 빨래들은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는 배와 같습니다 정박을 끝내고 항구를 떠나가는 한 척의 배, 누나가 만난 남자가 그러했습니다 소식도 없이 떠나곤 하던 남자가 돌아온 날은 줄에 유랑의 세월을 담은 돛이 바람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을 때까지 누나의 빨랫줄엔 세상의 파랑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강 밑바닥까지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오늘은 자식들의 아버지 제삿날입니다 짚수세미로 제기를 닦는 외할머니의 곁에서 손녀의 눈은 까맣게 윤이 나고 누나는 지나온 세월의 캄캄한 마룻바닥을 걸어 어느새 다 자란 딸의 부신 눈과 마주칩니다 강물 소리가 들립니다 물밑까지 들어간 무지개의 기둥, 그 폐허의 떨림이 이루는 무늬가 짙어올수록 누나는 그것이 자식들의 숨소리로 나뉘는 것을 봅니다 영정 앞에서 향을 사르는 두 아들이 아버지의 나이로 자란 지금도, 아버지는 잊고 싶은 흉터와도 같은 존재지만, 강물 속에 거꾸로 쳐박힌 고목은 가을 속에서 지독하게 못난 육체를 드러내며 강 밑바닥까지 바람에 터진 손가락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무지개가 알[卵]처럼 태어나고 있습니다

  누나는 강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배가 빨래를 헹구는 내내 누나의 손끝에서 눈부시게 흰 돛을 펴고 물살을 가르고 있습니다  朔望삭망입니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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