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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즐거움/시사랑

환절기 / 도종환

초록느낌 2011. 8. 17. 13:56

 

 

 

       환절기

 

 

 

여름은 가을로 아프게 넘어갔다

여름이 너무 길고 격렬해

올가을엔 단풍이 늦어지겠지만

기온이 낮아질수록 단풍은 곱게 물든다고 했다

여름은 가을로 스산하게 넘어갔다

일교차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커

낡은 외투의 깃을 자꾸 끌어올리려 했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은 옛 술집 근처로 모였다

새로 닦아놓은 길은 황폐해지고

실망한 나무들은 일찍 잎을 버려서

이슬이 내리기도 전에 마을은 눅눅하였다

여름은 가을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구름도 흑백사진의 한 귀퉁이처럼 웅크리고 있았다

어이없이 쫓겨난 채 집의

허울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도

전기도 수돗물도 끊긴 가을은 왔고

탐욕이라고 불러도 좋고

환멸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폭력적인 한 시대가 긴 그림자로

골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팔 한짝을 잃어버린 옷소매처럼 마음

허공으로 풀풀 날려다녔지만

비루함과 무기력의 껍질을 벗고

귀뚜라미처럼 더듬이를 허공에 올린 채

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대해 타전하고 싶었다

우리가 어찌하지 못하는 시간 말고

천천히 바뀌며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는

또하나의 거대한 시간 쪽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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