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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즐거움/시사랑

보리수 열매를 따는 여자 - 박형준

초록느낌 2010. 9. 18. 20:40

 

 

 

 

 

 

보드라운 한숨을 싣고 구름이 날아갔다

그녀의 청동 이마가 둥그래지며 넓어질 때

비가 내리고 구름의 바퀴들이 걸린

나뭇가지마다 지나온 세월의 옷가지가 한줌의

미풍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비가 내렸다

 

보리수 열매를 따러 가는 외할머니를 따라

언덕을 올라올 때, 비 그친 짙은 음영 속에서

잠깐씩 비치는 햇빛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보리수가 하얗게 흔들렸다

느림의 전율로 떠다니는 구름들은 모두가

커다란 날개처럼 잎을 이루고 있는 듯했고

그 희디흰 날개들이 펄럭일 때마다 상처가 생겨나듯,

보리수는 시월의 숲길에서 붉은 열매를 달고

한없이 웅크린 자세로 어둠을 끌어안고 있었다

보리수 열매를 따는 외할머니는

가끔씩 손을 활짝 펴 내가 딴 것들을 받아 입에 넣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동자 속

세월의 둥근 청동 이끼가 흘러나오며

시월의 햇살을 닮은 보리수 잎들을 한없이 하늘로 밀어 올려주었다

 

눈이 시려,

나는 눈을 감았다

보드라운 한숨을 싣고

구름이 날아갔다

그녀의 청동 이마가 둥그래지며 넓어질 때

비가 내렸고, 구름의 바퀴들이 걸린 나뭇가지마다

지나온 세월의 옷가지가 한줌의 미풍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외할머니가 죽었다 이십대의 마지막이었다

내 인생의 느림이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날개 때문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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