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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얼굴이 만져지는 밤 / 김지녀 본문

문학의 즐거움/시사랑

먼지의 얼굴이 만져지는 밤 / 김지녀

초록느낌 2010. 4. 20. 18:44

 

 

 

 

 

 

잠깐 떠돌다 온 얼굴이라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바닥에 놓인 징검다리, 하나씩 건너가면

나는 안과 밖을 지우는 자

 

멀리 갈수록 모든 사물은 흑백으로 명백하게

내 앞에서 한순간에 늙어 버린 그림자들

이곳에서 나는 자주 실족했다 낮인지 밤인지 알수 없던 날에

누군가의 실종 소식을 들었고

액자 속에서 수백년 동안 웃고 있을 얼굴을 떠올렸지만

 

가장 부드러운 붓으로 털어도 그 얼굴에서 떨어지는 살비듬은

내가 걸어 보지 못한 대륙의 바위이거나 나무뿌리일 것이다, 만져 보면

흑발(黑髮)과 흑안(黑眼)을 가진 사람들

느닷없이 마주치고 그때마다 나는 어두워지고 또 어두워져서

주문을 외는 순간에

 

단단한 바닥이 검은 입술을 열었다 닫는다

땅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무성영화의 배우들처럼

고요를 데리고 와 내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땅의 뜨거운 입김을 느낀다, 그 사이

 

밖에서 잎을 떨고 있는 저 나무 아래 고인

물속 하늘에서 몇 개의 발자국이 담겼다 사라졌다

나는 가벼운 돌 하나를 더 내려놓으며

더욱 깊어지는 바닥을 다 건너지 못하고

 

가라앉아 간다 눈길 닿지 않는 곳에서 얼룩진 얼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소리 없이

안과 밖을 지우는 비가 오는 밤,

기도(氣道)를 타고 내 안으로 천천히

 

 

 

 

 

 

 

 

 

시소의 감정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