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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소주병이 버려져 있는 해질녘 [김남호] 본문

문학의 즐거움/시사랑

진로소주병이 버려져 있는 해질녘 [김남호]

초록느낌 2009. 10. 21. 16:56

 

 

 

 

진로소주병이 버려져 있는 해질녘*

 

 

 

   그 나무의 절반은  금덩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숯덩이었다 빛은 술덩이 쪽에서 났다 어쩌면 금덩이 쪽에서 났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나는 숯덩이에 진 빚이 있다 숯덩이에서 빛이 나야 한다 그러면 황금과 숯덩이의 거리만큼 내 부채는 탕감될 것이다 저녘새들이 나무로 돌아오고 있다 그들은 황금 쪽 가지에 줄지어 앉을 것이다 황금가지는 곧 숯덩이로 바뀔 것이고 오늘 저녁 메뉴는 새구이가 될 것이다 물론 새의 눈을 피해서 살점을 발라내겠지만, 살점이 다 뜯겨나간 후 앙상한 새의 늑골 속에 들어앉은 두꺼비들이 과연 황금보기를 숯같이 할 수 있을까?

 

 

 

 

 

 

*최승호의 시    백세주병이 버려져 있는 해질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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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주병이 버려져 있는 해질녘 / 최승호


골리앗크레인으로도 들어올릴 수 없는 구름들
나이가 팔만 사천 살쯤은 돼 보이는
누더기 구름들이 夕陽天을 흘러간다

눈앞에는 티끌더미처럼 흘러다니는
하루살이떼의 군무,
몸을 거뜬하게 들어올리는 날개들과
어처구니없게 추락하지 않는 자연스런 비행술

하루살이 눈앞에 비치는
日沒 무렵 붉은 하늘은
얼마나 큰 여백이고 불길함인가

오물과 중금속과 거품덩어리가
둥둥 떠내려오는 개천가에
빈 백세주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

얼마나 하찮은 하루들을 살아왔는지
내가 누추하게 장수하는 하루살이 같구나
그래도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면
요절한 신선 팽조처럼
오륙백살 정도는 살아보고 싶구나


최승호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열림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