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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즐거움/시사랑

어머니, 아직 저녁 찬 바람은 멀었습니다 / 이은심

초록느낌 2009. 6. 19. 14:28

 

 

 

 

어머니,
평생 달려와 멈춰선 이 곳에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이 있네요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덩이가 금빛 띠 출렁이고
햇노랗게 익어가는 벼이삭 물결치는 들판이
멀찌감치 바라다보이는 곳
늘 푸른 나무들이 울바자 두른 곳에
절로 푸성귀 자라나는 통나무 집이 있네요

어머니,
그동안 못난 딸 지켜보느라 힘드셨지요
이 것 저 것 넘치도록 거름주면서도
활짝 피어나지 못하는 꽃나무 기르시느라 힘드셨지요
오늘에사 뒤늦게 깨달은 딸이
들국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풀밭이 있는
넓적한 하얀 바위 식탁에
이제 손과 몸이 차가와지신 어머니를 초대해
한 끼 식사를 대접해드리려 합니다

어머니,
이제 마음 편히 가지셔도 좋습니다
위 아래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뜨락과 현관 사이를 경쾌하게 오가는
바람 햇살에 물결치는 풀잎 위를
하얀 나비처럼 사뿐 사뿐 날으는 딸아이 모습을
다만 만족스럽게 지켜보시어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쩌낸 백설기와
어제 종일 끓여 밤새 식힌 식혜를 들어보시어요

어머니,
세상에 보람없는 일은 없을 테지요
이제 어머니 눈가에 더없이 평화스러운 미소를
보는 것만 같아요
아직 저녁 찬 바람은 멀었습니다
뉘엿뉘엿 느릅나무 산기슭을 물들이는
가을날 오후의 햇살에
서로 물결치듯 기대인 따끈 따끈한 어깨
마음 깊은 곳에서 풀어지는 가을휴식이
어머니와 딸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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