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뒤흔든 이름 위대한 노동자였습니다
그해 겨울 뒤흔든 이름 위대한 노동자였습니다 | |
1996년 12월26일 새벽 6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민주노총은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수배가 된 저는 함께 농성을 했습니다 노동자 투쟁이 범국민운동이 되고 오만한 권력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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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34
1996년 12월26일 새벽 6시 김영삼 정부와 신한국당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기습적으로 날치기 처리하였습니다. 성탄 캐럴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 새벽, 거룩한 밤을 찬미하는 기도와 성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습니다.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은 복수노조 전면 유예와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등의 단결권이나 단체행동권을 심각히 제약하는 것과 정리해고 도입, 변형근로제 도입 같은 독소조항으로 가득했습니다. 또 안기부법은 국가보안법상의 고무 찬양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부여하고 있는 반민주적인 악법이었습니다.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운동 진영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서울 시내 각 호텔에 분산해 있다가 새벽에 동원된 154명의 의원들(156명 중에 김윤환 의원은 외유중, 이신범 의원은 지각)은 “표결을 시작하겠다”는 구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총 11번을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11건의 노동법, 안기부 관련법을 처리했습니다. 시간은 6분 10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6분 10초면 라면 한 그릇을 끓이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8개월을 끌어온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입니다. 날치기를 끝낸 일부 의원들은 여의도의 식당으로 몰려가 축배를 들었고, 법안 처리 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청남대로 휴가를 내려왔습니다. 민주노총은 바로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투쟁을 선언하였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장외투쟁에 나섰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가 끝난 걸 보고 청남대 별장으로 휴가를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들은 청남대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법이 발효되기 전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청댐 안쪽에 있는 청남대는 청주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대책위는 가다가 문의로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경찰에 막혀 몸싸움을 했고 일부는 경찰에 연행이 되었습니다. 김인국 신부와 시내로 돌아오다가 수배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도망을 쳐야 했는데 연말에서 신정으로 이어지는 시기라 여관을 전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월1일 아침에는 문을 연 식당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청주로 내려와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울에서는 총파업 지도부가 명동성당에 천막을 치고 농성본부를 차렸는데, 우리 지역도 내덕동 성당에 천막을 치고 민주노총충북본부 배창호 의장, 김재수 사무처장 등 총파업 지도부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신순근 신부님이 성당 한쪽에 천막을 치게 양해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어떤 날은 살을 얼리는 바람이 밤새 천막을 가린 비닐을 흔들고, 어떤 날은 눈보라가 진종일 몰아쳤습니다. 한겨울에 천막 날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나면 얼굴이 부석부석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마에 머리띠를 묶으며 거리로 나갔습니다. 경찰이 제게 보내는 출두요구서는 파업투쟁이 끝날 때까지 여덟번이나 날아왔지만 응하지 않았습니다. 경찰들도 제가 낮에는 노동자들의 한가운데 있고 밤이면 성당 천막에 있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항상 노동자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경찰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판단을 저울질하고 있었을 겁니다.
교육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거리에서 서명 받는 것도 겸연쩍고 불편했습니다. 항의방문을 다니며 정당의 당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도 어색했고, 대중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연일 계속되는 집회를 이끌면서 매일 거리에서 대중 연설을 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김영삼 정권 날치기면 노동자는 박치기다” “총파업투쟁 동참하여 아내에게 사랑받자” “나는 03당이 싫어요” 이런 구호들이 터져 나와 힘든 시위에 웃음과 힘을 주는 날이 많았습니다. 2단계 총파업에서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연대하면서 전국적으로 사상 최대 규모인 75만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강경 방침을 유지하던 김영삼 정부도 결국 개정 노동법안이 시행되는 3월1일 이전에 국회에서 재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1월23일 한보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동안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나 노동운동이 경제를 침체시키는 요인이라고 강변해 왔는데 정부와 부패한 재벌이야말로 국가경제를 망치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연이어 김영삼 대통령 아들의 비리가 함께 딸려 나왔고, 신한국당과 김영삼 정권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어 2월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하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날치기 통과된 법들을 재개정하고 오만한 권력을 국민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3월 초 여야가 다시 논의한 노동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2월 하순, 저는 충북민예총과 함께 그동안의 싸움을 집체극을 통해 마무리하는 <악법철폐 위해 싸우는 노동자가 자랑스러워요>라는 제목의 문화공연을 열었습니다. 제가 대본 초안을 쓰고 박종관(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이 연출을 하였습니다. 그 공연에서 저는 <노동자 그대의 이름은 아름답다>라는 시를 낭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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