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즐거움/시사랑
가로수의 길 - 김행숙
초록느낌
2010. 10. 11. 21:32
플랫폼에서 서서히 떠나는 기차처럼 지나갔지
그래서 너는 참 길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기차처럼
너는 다음 칸을 가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어
그 외에는 가진 게 없다는 듯이
기차에 대해 생각하고
너에 대해 생각하고
길거리에는 얼마나 많은 기로수들이 모자를 내려놓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들이 가장 크게 입을 벌렸을 때
땅이 조금 흔들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가로수와 가로수의 간격은 법으로 정해져 있을까, 발과 발을 모으고 나서
뾰족한 자세로 그런 생각을 해
가로수와 가로수의 사이는 다정한 곳일까
무서운 곳일까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는 자동차의 사이에 대해 생각하고
치어죽은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로부터 너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경적소리가 되고 싶어
모두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이 도시를 텅 비웁시다
미래에
유령이 되어 돌아오자, 다신 돌아오지 말자, 사이에서 유령의 감정을 생각해내려 애쓰며
거울을 보다가 유리를 보듯이
너를 높이 높이 떠올리며 걸어갔어
유리창은 어떻게 박살이 났을까
유리에서 맑은 하늘까지
너는 참 길구나, 그렇게 생각이 길어져
맑은 하늘에서 물속에 잠긴 도시까지
화염이 애타게 포옹한 우리들의 도시까지
ㅡ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