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즐거움/시사랑

진흙 - 박형준

초록느낌 2010. 9. 13. 17:48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구름,

그것은 오래 전부터 빛나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고 깜박 잊어버린

물건을 어느날 빨래를 하다 우연히 발견하듯,

작은 구름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먼지투성이 선반에는 가끔씩

바퀴벌레가 지나가고

웃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추석이나 설 때 이 집에는 많은

신발들이 붐볐다, 그때

선반에 올려진 구름은 얼마나 풍요로웠던가

 

사내는 열려진 부엌 창문 너머

가스관을 타고 올라오는 호박 덩굴을 바라본다

호바꽃 속에 잉잉거리는 벌 한 마리,

쉴새없이 움직이는 날개는

물기에 젖은 사내의 꾹 다물린 입술을 환기시킨다

 

늙는다는 것은 , 방 속에 담겨

천천히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구름이

더이상 궁금해지지 않는  것이다

사내는 오수에 빠져든다, 불꽃을 품고

잠깐 저녁 어스름이 머물다 간 창문들,

생의 기나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말없이

풍경을 사유하는 저 얇디얇은  구름은

분명 선반에 올려져  있던 것이다

 

불그스름한 빛이 열려진 부엌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온다, 방안은 琥珀빛 너울로 출렁거린다

가느다란 호박 덩굴이 하늘로 뻗어올라가는

동앗줄이 되고 작은 구름이

선반의 그릇 무늬에 빛난다

사내의 이마에 새겨진 진흙이 꿈틀 일어선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