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즐거움/시사랑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초록느낌
2010. 6. 24. 12:23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끝을 날카롭게 구부리고 지붕 위를 떠가는 초승달
왜 입 안에 신침이 고이는 걸까
껍질 반쯤 벗겨진 사이로
신물 주르륵 흘러내리고 노란 껍질 위에 이슬 맺혀
익다 못해 터진 그 사이로 안개처럼 떠 있는
앞에는 키 작은 아이들 뒤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100년 전 사람들 단장을 짚고 안경을 쓰고
줄줄이 서 있던 일족의 흑백사진
한 잎 배를 타고 칠흑의 밤을 노저어 가던 그 집
그 집 벽 위 액자에도 저런 빛깔의 과일이 한 쪽 떠 있었던 것만 같다
먹어본 듯하나 아직 먹어보지 못한
주르륵 지붕 위로 미끄러져 내리던
100년도 전에 그 집 사람들 미끄러져 가면서
남자가 입덧 중인 여자에게
열매를 까서 한 쪽씩 입에 넣어 주고
아기들에게도 쪼개 주고
둘러앉아 한쪽 눈을 찌그리며 터뜨려 먹고 있는데
그때 밀감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신 살구 빛의
그것이 먹고 싶어
어미의 갈비뼈 밑으로 기어들어간 그 기억 때문일까
깜깜한 밤하늘 뚫고 신 살구 빛의 새초롬한 달
신 물 터져나오면 한쪽 눈이 찌그러지다 환해지는데
그 집 액자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밤배 탄 사람들
아직도 기린처럼
그 열매 끌어내려 터뜨려 먹으며 가고 있는지
잔뜩 구부리고 초승달 미끄러져 내린다
-최정례시집/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