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즐거움/시사랑
사소한 기억 [박철]
초록느낌
2009. 11. 17. 16:51
오늘 몇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말할 수가 없다
바람처럼 가볍고 너무나 사소한 일들이어서
나는 그저 나부끼는 대로
이면지 위에 '그대' 라고 한 마디 적었다
그대는 당신이고, 강이고, 겨울 사시나무이며 우리들의 젊은 날이다
젊은 날 우리는 나를 실어나르는 전동열차의 흔들림과 반복되는 율동에
얼마나 많은 티켓을 지불했나
아주 사사롭게도
긴 겨울강
점점 더 넓어져 머리를 확 풀어선
결국 바다가 되는 한강 하류에서
나는 자랐다 뱅어며 황복 실뱀장어를 거두어
굴뚝 연기를 피워올리는 마을을 떠난 것도
다 당신 탓이다 나이가 들어서
겨울강을 잊고 정발산에 오른다
나는 가을이 지나고 나서
이번 겨울 내내 뒷산 사시나무가 마음에 걸렸다
낙엽처럼 사람 발길 떨어진 언덕의 사시나무도 나처럼 추울까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빈산에선
나무들이 잘 살고 있었다
수척한 나무는 바람이 찰수록 껍질과 몸뚱이가 더욱 뜨겁게
껴안고 있었다 깊게 사랑을 하고 있었다
황량한 겨울산은 따뜻해 보였다
숲이 사라지고 나무만 남은 등고선
또다른 사랑의 강이 흐른다
나는 요즘 겨울나무와
은밀한 당신이 부러워
밥을 먹지 못할 지경이다
사소하게도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