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라의 점묘화 [나희덕]
언제부턴가 선이 무서워졌어요 거침없이 달리며 형태와 색채를 뿜어내는 선에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사물에 대한 의심이 많아졌다고 할까요 아니면 빛에 대한 난해한 사랑이 생겼다고 할까요 선들이 내지르는 굉음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일요일 오후 양산을 쓰고 걸어가는 여자도 강둑에서 몸을 말리는 남자도 나팔을 부는 소년도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도 처음엔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었지요 그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을 빻고 또 빻는 일뿐이었어요 아침에 문밖에서 길어온 이미지를 불에 달군 쇠막대기처럼 망치로 종일 두드려요 저녁 무렵에야 뜨거워진 선에서 떨어져나온 쇳가루들이 캔버스에 점점이 흩어지지요 빛은 가루가 되어 다른 빛과 몸을 섞어요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에 스며들어요 검은 개는 더이상 검은 개가 아니에요 개의 털빛과 그 위에 내리는 빛이 만나 어룽거려요 희미해진 개와 고양이와 사람 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지요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어요 서로를 삼키고 비추는 점들의 환영, 그 한 폭의 기이한 평화 앞에서 내 눈은 점점 어두워져요
[야생사과]
해설
쇠라의 점묘화가 빛과 면, 선과 색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면 나희덕의 시는 시간과 언어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선분성에 대해 수직성으로 응할 수 없는 이의 속사정, "선들이 내지르는 굉음" 을 선들이 미분하는 수직성의 연쇄로
잦아들게 할 수 없는 이의 사정이 이 시에 나타나 있다.
"완강한 선" 의 활주에 대해 시인은 시적 순간들로 응대하는 대신 그 선분을 빻아 가루로 만든다.
그 작업을 통해 시간은 활주하지도 않고 곤두서지도 않은 채 바스러진다.
선분적 시간에 대해 수직성으로 응대할 수 없다면 그 다음 대응책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 부서진 것들의 이미지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강석/ 문학평론가 )